디자인 채용공고에 400명이 지원했다. 실제 지원서에서 보인 세 가지 패턴
디자인 채용공고에 400명이 지원했다. 실제 지원서에서 보인 세 가지 패턴
최근 회사에서 디자이너 한 명을 뽑기 위해 채용공고를 올렸습니다.
일주일 뒤 지원자 수를 확인했는데 400명에 가까웠습니다. 처음 든 생각은 “요즘 정말 취업하기 어렵구나”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걸 언제 다 보지?”였습니다.
뉴질랜드 취업 시장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었습니다. 뉴스에서도 실업률이나 청년 취업난 이야기가 계속 나왔고요. 그런데 숫자로 보는 것과 실제 채용 화면에 400개의 지원서가 쌓여 있는 걸 보는 건 느낌이 꽤 달랐습니다.
‘아, 진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구나.’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400명이 모두 비슷한 조건에서 경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원서를 하나씩 넘겨보니 몇 가지 패턴이 아주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먼저 밝혀둘 점이 있습니다. 아래 비율은 뉴질랜드 전체 디자인 취업 시장에 대한 공식 통계가 아닙니다. 제가 최근 진행한 한 번의 채용에서 본 지원자들의 대략적인 분포입니다.
첫 번째, 지원자의 절반 가까이가 해외에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해외 지원자였습니다.
체감상 전체의 절반 정도가 아직 뉴질랜드에 거주하지 않는 지원자였습니다. 인도, 중국, 유럽, 남미 등 지역도 다양했습니다. 경력이 꽤 좋은 사람도 많았고, 포트폴리오만 보면 현지 지원자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CV를 읽다 보면 현재 거주지가 없었습니다. 비자 상태도 찾기 어려웠구요.
커버레터 마지막에 가서야 “비자 스폰서십이 가능하다면 뉴질랜드로 이주할 수 있다”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해외 지원자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라도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면 일단 지원해봤을 겁니다. 문제는 이번 포지션이 바로 출근할 수 있고, 뉴질랜드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뉴질랜드의 작은 회사가 직원 한 명을 뽑기 위해 비자 스폰서십과 장기간의 입국 절차까지 진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디자인팀도 사람이 부족해서 채용하는 상황인데 몇 달을 기다리기는 더 어렵습니다.
결국 실력과 상관없이 첫 검토 단계에서 빠지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해외에서 뉴질랜드 회사에 지원한다면 CV 위쪽에 다음 정보는 바로 보이게 적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뉴질랜드 회사에 지원한다면 현재 거주 지역, 뉴질랜드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 상태, 실제 출근 가능한 날짜 정도는 CV 상단에서 바로 보이게 해두는 걸 추천합니다.
면접관이 이 정보를 찾으려고 CV 전체를 뒤져야 한다면, 이미 조금 불리하게 시작하는 셈입니다.
두 번째, 신입 지원서는 생각보다 열어보기 어려웠다
해외 지원자 다음으로 많았던 건 학교를 막 졸업한 주니어 디자이너였습니다.
이 부분은 쓰면서도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저 역시 뉴질랜드에서 첫 디자인 직장을 구할 때 현지 경력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했던 작업물을 영어로 바꾸고, 남아 있지도 않은 원본 파일을 찾고, 몇 개 안 되는 프로젝트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습니다.
지원서를 보내도 답장이 없던 때가 있었고 “Kiwi Experience가 없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반대편에서 400개의 지원서를 보게 되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회사 쪽 사정도 보였습니다.
지원자가 몇십 명일 때는 한 사람의 포트폴리오를 천천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400명 가까이 되면 처음에는 CV를 아주 빠르게 훑게 됩니다.
현재 위치는 어디인지, 관련 경험이 있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다루는지, 지금 맡기려는 업무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지.
이걸 짧은 시간 안에 확인합니다.
그리고 경력이 완전히 비어 있고 자기소개가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도로만 적혀 있으면 포트폴리오까지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몇몇 신입 지원자의 포트폴리오 링크를 열지 못하고 다음 지원서로 넘어갔습니다.
‘포트폴리오가 전부’라고 말하면서 정작 포트폴리오를 보지 않는다는 게 모순처럼 들릴 겁니다. 맞습니다. 저도 좀 모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은 디자인팀에서는 신입 한 명을 처음부터 가르칠 시간과 사람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파일 정리 방식부터 인쇄 사양, 브랜드 가이드라인 적용, 실제 수정 프로세스까지 하나씩 알려주다 보면 기존 팀원의 업무가 그만큼 밀립니다.
회사에서는 결국 이런 질문을 먼저 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작은 작업 하나를 맡겼을 때, 혼자서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까?”
대단한 경력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작은 경험이라도 괜찮습니다. 실제 고객의 수정 요청을 받아봤거나, 인쇄소에 파일을 넘겨봤거나, 정해진 브랜드 가이드 안에서 작업을 완료해 본 경험 같은 것 말입니다.
세 번째, 숫자는 400명이었지만 조건에 맞는 지원자는 훨씬 적었다
해외 지원자와 경력이 전혀 없는 지원자를 제외하면 회사가 현실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후보자는 전체의 4분의 1 정도로 줄었습니다.
그 안에서도 다시 차이가 났습니다.
포트폴리오 링크가 깨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PDF 용량이 지나치게 커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팀 프로젝트를 보여주면서 본인이 무엇을 담당했는지 전혀 적지 않은 포트폴리오도 많았습니다.
예쁜 목업 이미지는 열 장이 넘는데 정작 어떤 문제를 해결한 작업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구요.
반대로 기억에 남는 지원서는 의외로 가장 화려한 포트폴리오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젝트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이 적혀 있고, 처음 시안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어떤 제약 안에서 결과물을 만들었는지 보여준 포트폴리오였습니다.
면접관이 내용을 추측하지 않아도 되는 포트폴리오라고 해야 할까요.
잘 만든 포트폴리오는 작업물을 자랑하는 문서라기보다, 면접관의 질문을 미리 없애주는 문서에 가까웠습니다.
지원자의 현재 위치와 비자 상태, 실제 담당 업무,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한눈에 들어오면 검토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합니다. 같이 일했을 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400명이라는 숫자만 보면 지원할 엄두가 안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원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그 정보를 제대로 보여준 사람의 수는 400명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학교 과제가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학교 과제로 만든 포트폴리오가 무조건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학교 작업만 있는 포트폴리오는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브리프를 받고, 비슷한 목업을 사용하고, 결과물을 예쁘게 정리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실무에서 궁금한 것은 조금 다릅니다.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러 시안 중 왜 그 방향을 선택했는지
팀 프로젝트에서 본인이 실제로 한 작업은 무엇인지
가능하다면 로컬 스몰 비즈니스나 커뮤니티 단체와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카페 메뉴판이나 소규모 행사 포스터, 간단한 브랜드 정리 작업도 괜찮습니다.
다만 무조건 공짜로 오래 일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작업 범위를 작게 정하고, 가능하다면 적은 비용이라도 받는 것이 좋습니다. 무료로 시작한 작업은 수정 범위가 끝없이 늘어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프로젝트의 크기가 아니라 실제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끝내본 경험입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보다 먼저 보여줘야 하는 것
신입 지원자의 커버레터에서 정말 자주 본 문장이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좋은 태도입니다. 배우려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회사가 처음 궁금해하는 건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보다 “지금 무엇을 맡길 수 있는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라도 조금 다르게 쓰는 편이 낫습니다.
“브랜딩을 배우고 싶습니다”보다는 “학교 프로젝트와 소규모 클라이언트 작업을 통해 로고, 메뉴판, 소셜미디어 그래픽을 제작했습니다”라고 쓰는 것이 낫습니다.
“Adobe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보다는 “InDesign으로 20페이지 브로슈어를 제작해 인쇄용 파일까지 전달했습니다”가 더 구체적입니다.
면접관은 지원자의 가능성을 상상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미 해본 일을 보여줘야 그다음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입은 안 뽑는데 경력은 어디에서 쌓을까
지원서를 검토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회사는 경험이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경험자를 원하면 신입은 어디에서 첫 경험을 만들어야 할까요.
저도 이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동시에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신입의 답답함도 이해됩니다. 저도 그 시간을 지나왔으니까요.
회사는 경험이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모든 회사가 경험자를 원하면 신입은 어디에서 첫 경험을 만들어야 할까요.
저도 이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번에 지원서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도 이것이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당장 일을 맡길 사람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고, 신입 입장에서는 첫 기회를 얻지 못하면 경력을 만들 방법이 없습니다.
양쪽 입장을 모두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400명 사이에서 포트폴리오를 열게 만드는 방법

이번 채용을 진행하면서 제가 느낀 건, 면접관이 반드시 가장 뛰어난 디자이너만 찾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함께 일할 때 불확실성이 적은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첫 디자인 직장을 준비한다면 CV와 포트폴리오에서 다음 내용은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포트폴리오 첫 프로젝트를 가장 신경 써야 합니다.
면접관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차분히 봐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첫 프로젝트에서 관련성을 찾지 못하면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신입 디자이너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역시 이번 채용에서 좋은 사람을 놓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지원서를 보다 보니 충분히 보지 못한 포트폴리오도 있었을 겁니다. 그 점은 저도 마음에 남습니다.
다만 이것이 제가 이번 채용에서 경험한 현실이었습니다.
400명이라는 숫자는 무섭지만, 면접관이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정리한 지원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트폴리오도 하나의 디자인 작업이었습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전부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걸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
그 사람이 처음 무엇을 궁금해할지, 어떤 정보를 찾을지, 어디에서 지칠지를 생각하고 순서를 정하는 것.
우리가 실제 디자인을 할 때 늘 고민하는 User Experience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400개의 지원서를 넘기고 나서 오히려 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좋은 포트폴리오는 “나 이렇게 잘해요”라고 크게 외치는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바쁜 면접관이 나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포트폴리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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