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거나 장기 정착을 준비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듣는, 그리고 가장 환상을 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참 편해. 남들 시선 전혀 신경 안 써서 사계절 내내 티셔츠에 플립플랍(쪼리)만 끌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봐."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 역시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올 때, 2000년대 초반의 기억을 간직한 남편 (우리 남편은 2000년대초 대학교 시절 뉴질랜드에서 1년 여행을 했습니다) 이 제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명품 백 같은 거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봐. 거긴 다들 소박하게 입고 다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저는 제가 가장 아끼던 루이비통 백 (마침 손잡이가 끊어지기도 했지만), 아끼던 화려한 옷, 아끼던 화려한 신발을 한국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고 뉴질랜드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막상 와서 겪어보니 백인(키위)들도 명품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주말에 동네 마트를 갈 때는 대충 걸치고 다녀도 편한 게 맞지만, 오클랜드 시티 한복판으로 출근하는 직장 생활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말에 커피를 마시러 가면 화려하게 입은 백인, 그리고 명품백 (내가 버린 그 가방!!!!). 그때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아직까지 남편에게 너때문에 내 가방을.. 이라며 화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하

단순한 이민자이자 아시안 여성으로서, 제가 뉴질랜드 시티 직장 생활을 하며 온몸으로 느꼈던 그 미묘한 '시선의 온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 1. 깔끔함과 단정함: 평범한 아시안 이민자가 나를 증명하는 법

저는 뉴질랜드에서 특별한 천재성을 지닌 사람도 아니고, 거대한 자본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낯선 영어 환경 속에서 평범한 아시안 이민자인 제가 온전히 내밀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꾸준함', 그리고 바로 '깔끔함'이었습니다.

주말에 집 근처를 다닐 때는 저 역시 남들 눈치 안 보고 누구보다 편하게 다닙니다. 그게 뉴질랜드의 큰 매력이니까요.

하지만 월요일 아침, 시티 오피스로 출근할 때만큼은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구두를 신습니다. 키위들도 꾸미는 것을 정말 좋아하고, 특별한 파티나 행사가 있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 못지않게 엄청나게 화려하고 드레시하게 차려입습니다. 그들도 사람인데 왜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 2. 미묘한 시선의 변화: '작은 아시안'에서 '존중받는 인간'으로

직장 생활을 오래 다져오면서 느낀 가장 솔직한 감정은, 내가 어떻게 입고 출근하느냐에 따라 나를 대하는 주변의 미묘한 공기가 바뀐다는 점이었습니다.

단정하고 멋지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날에는 아침에 커피를 살 때 점원의 눈빛부터 다릅니다. 출근길 엘레베이터를 탈 때, 혹은 퇴근 후 다 함께 회식을 하러 조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갈 때 사람들의 시선에서 "아, 저 사람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이구나"라는 무언의 리스펙트가 느껴집니다. 한번은 엘레베이터에서 멋진 노신사가 " 멋진 아가씨, 몇층을 가시나요" 라며..  친절하게 버튼을 눌러주기도 했는데 이게 평범한 일이지만 제가 대충입고 출근하는날에는 느낄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였습니다.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할 때의 시선이 '그저 흔하디흔한, 말수 적고 키 작은 아시안 이민자'이었다면, 잘 어울리는 자켓을 입고 깔끔하게 세팅한 날의 시선은 나를 당당한 하나의 '인간'이자 '뉴질사회의 사회구성원'으로 대우해 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뉴질랜드는 인종차별이 없는 신사의 나라라고들 하지만, 비즈니스 필드에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외모와 차림새가 그 사람의 프로페셔널함을 대변한다"는 보이지 않는 룰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 '편안함'이라는 덫에 갇히지 않기를

뉴질랜드가 주는 "남 신경 안 쓰는 편안함"은 분명 달콤한 축복입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현지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깊숙이 들어가 소통하다 보면, 그 편안함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미묘한 계급장과 시선의 차이를 반드시 느끼게 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단정하게 가꿀 때, 상대방도 비로소 나를 존중 섞인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은 명품 백으로 온몸을 도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이국땅에서 나라는 사람의 성실함과 프로페셔널함을 '단정한 옷차림과 깔끔함'이라는 가장 직관적인 언어로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혹시 "뉴질랜드는 대충 입어도 돼"라는 말만 믿고 매일 소중한 나를 무채색 옷 속에 감춰두고 계시진 않나요? 내일 출근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멋진 옷을 꺼내 입어보세요. 거울 속 당신의 당당해진 미소만큼, 나를 바라보는 오클랜드 시티의 공기도 기분 좋게 바뀌어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