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얼마 전, 숨을 고르러 이웃 나라 호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그 감성적인 시선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묘한 기시감(데자뷔)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넓게 펼쳐진 풍경, 눈에 익은 상가 거리, 심지어 간판의 색감과 서체까지… 순간 ‘내가 지금 오클랜드의 어느 동네를 걷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두 나라의 일상 인프라는 완벽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주유소를 가도, 쇼핑센터를 가도, 식당, 슈퍼를 가도 여행중인지... 살고 있는 오클랜드 동네와 모든것이 비슷해서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허물없는 닮은꼴 뒤편이 궁금해져 현지에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 리서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뉴질랜드에서 매일 마주하며 당연히 '키위(Kiwi) 브랜드'라고 믿었던 일상의 거대한 축들이 사실은 호주나 글로벌 기업의 손아귀에 있다는 서늘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1.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키위' 없는 키위 브랜드
우리가 뉴질랜드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위해 매일 카드를 긁는 거대 공룡 브랜드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충격적입니다.은행 (Banking): 뉴질랜드의 4대 메이저 은행인 ANZ, ASB, Westpac, BNZ 중 100% 자국 자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호주의 거대 금융 그룹(Commonwealth Bank, NAB 등)이 모기업입니다.마트 & 유통 (Retail): 뉴질랜드 전역의 골목과 중심가를 꽉 잡고 있는 대형 마트 'Woolworths(구 Countdown)'는 애초에 호주의 유통 거인 울워스 그룹의 소유입니다.
DIY & 대형 매장: 주말마다 홈오너들이 출근 도장을 찍는 Bunnings(버닝스)나 Kmart 역시 호주의 대기업 웨스파머스(Wesfarmers) 라인입니다. (호주 여행시 버닝스나 kmart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뉴질랜드 브랜드가 생각했었거든요...)
우리가 장을 보고, 돈을 맡기고, 집을 고치기 위해 지출하는 거대한 자본의 물줄기가 결국 타스만해(Tasman Sea)를 건너 호주 대기업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인구 500만 남짓한 작은 내수 시장의 한계로 인해, 조금만 덩치가 커지면 거대 호주 자본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뉴질랜드 비즈니스의 냉정한 현실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업들 외에, 자잘한 커피숍, 음료수, 과자, 옷 브랜드, 가방, 신발 브랜드.. 정말 많은 것들이 타스만해를 건너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이였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일반적으로 누렸던 모든것들에 대한 배신감같은 느낌이였으니깐요.
2. 감성에서 생존으로, ‘Proudly NZ’의 진짜 무게
호주 여행을 마치고 다시 뉴질랜드의 작업실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클라이언트들이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Proudly Made in New Zealand’와 ‘Proudly NZ Owned’라는 문구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이전에는 그 단어들이 그저 청정 자연에 대한 자부심이나 로컬을 향한 다정한 응원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본의 거대한 흐름을 눈으로 확인하고 난 뒤 깨달았습니다.
이 땅에서 거대 글로벌 자본의 공습에 밀리지 않고, 끝까지 대지 지분과 제조권을 지켜내며 "우리는 진짜 뉴질랜드 자국 브랜드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었습니다.
글로벌 자이언트들의 거센 물량공세 속에서 로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패키지에 고사리 마크(Fern Mark)를 새겨 넣는 현지 생산자들의 고집은, 거대 자본 권력에 대항해 "우리 것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외치는 그들만의 가장 당당한 방어선이었던 것입니다.
픽셀 위에 새겨 넣는 다짐
두 나라의 닮은꼴 풍경 뒤에 숨겨진 씁쓸한 자본의 논리를 보고 난 뒤, 저는 오늘 내 작업 창에 올려진 로컬 브랜드의 패키지 디자인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비록 대기업처럼 화려하거나 규모가 크진 않지만, 글로벌 자본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국의 이름을 걸고 버텨내는 진짜 'Proudly New Zealand' 브랜드들.
그들이 가진 단단한 정체성이 거대 자본에 쉽게 먹히지 않도록 시각적인 날개를 달아주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디자인을 하는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직업적 소명이자, 진짜 'Proudly'를 완성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록 대기업처럼 화려하거나 규모가 크진 않지만, 글로벌 자본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국의 이름을 걸고 버텨내는 진짜 'Proudly New Zealand' 브랜드들.
그들이 가진 단단한 정체성이 거대 자본에 쉽게 먹히지 않도록 시각적인 날개를 달아주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디자인을 하는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직업적 소명이자, 진짜 'Proudly'를 완성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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