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인들에게 '빨리빨리'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패시브 스킬입니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돌아가는 한국, 그리고 그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손이 빨랐던 K-직장인'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뉴질랜드 직장에 뚝 떨어졌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지구 반대편 남반구 섬나라에서 펼쳐진, 본의 아니게 무쌍을 찍어버린 저의 해외 직장 적응기입니다.



1. 1시간 만에 포스터 완성? 사무실이 뒤집어지다

뉴질랜드 회사에 입사한 초창기, 저에게 첫 프로젝트로 '포스터 디자인' 업무가 주어졌습니다. 속으로 '아니, 뭐 이런 간단한 걸 프로젝트라고 주나' 싶었던 저는 한국에서 하던 가락대로 집중해서 손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비쥬얼 시안 여러가지를 뚝딱 완성해서 공유했죠.

그 순간, 사무실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동료들이 제 모니터 앞으로 몰려들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쳤습니다.

Amazing! 아니, 어떻게 이 퀄리티의 디자인을 이 시간에 만들어?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데 솔직히 조금 얼떨떨했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그럼 시안 추가로 한 몇개 더 뽑아와 봐요"라는 말이 나왔을 텐데 말이죠.

2. 1분 컷 수정 요청, "You are my hero!"

뉴질랜드는 업무 소통을 주로 이메일로 합니다. 디자인 시안을 보내고 나니 "이것 좀 수정해 달라", "폰트 좀 바꿔달라"는 요청 메일들이 날아오기 시작하더군요.

한국에서 온 '속도 광인'인 저에게 피드백 수정쯤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메일을 받자마자 마우스를 몇 번 까딱여서 1분도 안 돼서 수정 완료 메일을 보냈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복잡한 작업도 길어야 1~2시간 안에 마무리해서 답장을 보냈죠.

그랬더니 메일함이 난리가 났습니다.

Oh my god, so fast!, You are super star!!

이쯤 되니 농담 조금 보태서, 제가 A4 용지에 선만 하나 찍 그어서 보내도 "Amazing!"이라고 박수를 쳐줄 기세였습니다. 졸지에 능력치 만렙 찍은 직장계의 슈퍼히어로가 된 기분이었죠.

3. 미스터리 해결: 답장 하나 받는데 1주일이 걸린다고?

'얘네는 왜 이렇게 사소한 거에 자지러질까?' 싶던 의문은, 제가 회사 외부의 현지 사람들과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완벽하게 풀렸습니다.

제가 외부 업체에 간단한 질문이나 요청 메일을 보내면, 답장이 오기까지 기본 일주일(1 Week)이 걸리더군요.

  • 월요일에 메일을 보내면 다음 주 월요일에 답장이 옵니다.
  • 그 답장에 내가 5분 만에 답장을 보내도, 그 다음 답장은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제야 왜 동료들이 1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1분 만에 답장을 보내는 저를 보며 '경이롭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이 나라의 평균 속도는 시속 10km인데, 혼자 한국산 KTX(시속 300km)를 타고 질주하고 있었으니 눈이 뒤집어질 수밖에요.

📝 '빠름'과 '느림'의 미학,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처음에는 뉴질랜드의 이 지독한(?) 느긋함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이러고도 나라가 돌아가나?' 싶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습니다. 이들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서로에게 가하는 마감 압박을 줄이고 각자의 삶의 템포를 존중해 주는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을요.

덕분에 저는 뉴질랜드 직장에서 '손 엄청 빠르고 일 잘하는 최고의 직원'이라는 치트키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훈련(?)이 뜻밖의 이국땅에서 빛을 발한 셈입니다.

혹시 한국에서 "너 왜 이렇게 손이 느리냐", "빨리빨리 못 하냐" 구박받으며 영혼을 갈아 넣고 계시는 K-직장인분들이 계시나요? 여러분의 그 장전된 속도 센스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Amazing'을 이끌어낼 엄청난 무기입니다. 다만 뉴질랜드에 오실 때는 그 속도 레버를 조금만 낮추고 오셔도 충분합니다. 너무 잘하면... 그게 그대로 나에게 독으로도 오더라구요.. ㅠ 더 빨리! 더빨리!를 외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