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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평범했던 ‘빨리빨리’, 뉴질랜드에서는 내 무기가 되었다

지독한 느긋함의 문화 속에서 독보적인 에이스로 살아남는 속도 조절 밸런스론

한국에서는 평범했던 ‘빨리빨리’, 뉴질랜드에서는 내 무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 빨리빨리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메일이 오면 빨리 답하고,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바로 처리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은 가능하면 오늘 끝낸다.

특히 디자인 일을 하다 보면 더 그렇다.

“이거 오늘 중으로 가능하죠?”

“시안 두세 개만 더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이것도 급한데…”

이런 말을 워낙 많이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빠르게 일하는 것이 그냥 기본값이 되어버린다.

나도 그랬다.

한국에서 일할 때 나는 원래 손이 빠른 편이었다. 디자인을 오래 해서 익숙한 것도 있었고, 성격 자체가 일을 쌓아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뉴질랜드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조금 이상한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는 별것 아니었던 내 업무 속도에 사람들이 너무 놀라는 것이었다.

입사 초기에 포스터 하나를 맡았다

뉴질랜드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첫 프로젝트 중 하나로 포스터 디자인을 맡았다.

브리프를 받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정도면 금방 하겠는데?'

한국에서 하던 대로 자료를 정리하고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를 잡고 몇 가지 방향을 빠르게 만들어봤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나 시안 몇 개를 공유했다.

그런데 반응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이 모니터 앞으로 오기 시작했다.

“Already?”

“How did you do this so quickly?”

“Amazing!”

나는 오히려 그 반응이 신기했다.

‘아니… 포스터인데?’

한국 회사였다면 아마 이런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좋네요. 그러면 이 방향으로 두 개만 더 볼까요?” 혹은 이건 어떻고, 저런 어떻고.. 이래서, 저래서.. 기타 등등... 

그런데 여기서는 한 시간 만에 몇 가지 방향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를 굉장히 놀랍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그냥 새로 온 직원이라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계속 생겼다.

1분짜리 수정에 “You are my hero!”

디자인 시안을 보내면 당연히 수정 요청이 온다.

“폰트 조금만 바꿔주세요.”

“이 문구를 여기로 옮길 수 있을까요?”

“로고를 조금 크게 해주세요.”

디자이너라면 알겠지만 어떤 수정은 정말 1분이면 끝난다.

그래서 메일을 확인하고 바로 수정해서 다시 보냈다.

그러면 답장이 온다.

“Oh my god, so fast!” 어떤 사람은 나에게 “You are my hero!” 라고까지 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고, 뭔가 부탁하면 빨리 해결해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생겼다.

조금 과장하면 내가 A4에 선 하나 그어서 보내도 “Amazing!”이라고 해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솔직히 재미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빠른 건가?’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이 정도로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 업체와 일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이해가 됐다

그러다 외부 업체들과 직접 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이해가 됐다.

간단한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하루가 지나도 답이 없다.

이틀이 지나도 없다.

‘바쁜가 보다.’

그렇게 기다린다.

며칠 뒤 답장이 온다.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 가까이 지나서 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 답장을 확인하고 5분 만에 다시 회신한다.

그러면 또 기다린다.

물론 모든 뉴질랜드 회사가 이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도 정말 빠르게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처음 경험했던 업무 환경에서는 한국에서 익숙했던 ‘즉시 처리’의 감각과 꽤 차이가 있었다.

그제야 회사 사람들이 왜 내 업무 속도에 그렇게 놀랐는지 조금 이해가 됐다.

내가 갑자기 일을 잘하게 된 게 아니었다.

내가 일하는 환경이 바뀌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습관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것이 여기서는 장점이 됐다

이 경험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내가 새로운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갑자기 Photoshop을 더 잘하게 된 것도 아니고,

디자인 실력이 하루아침에 늘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몸에 밴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빠르게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일단 첫 번째 결과물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

간단한 수정은 미루지 않고 바로 처리하는 것.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에 움직여도 마감을 놓치지 않는 것.

한국에서는 이런 것들이 특별한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하면 혼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환경이 바뀌자 그게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해주는 특징이 됐다.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너무 익숙해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다른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이 꼭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만은 아닌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처음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빠른 사람’이라는 평판에는 함정도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사람들이 나를 믿고,

급한 일이 있으면 나를 찾고,

“이 사람한테 주면 빨리 나온다”는 평판도 생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빠르게 해주면 다음에도 빠르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시간 만에 했던 작업은 어느 순간부터 한 시간이 기준이 된다.

당일에 수정해주던 사람에게는 다음 수정도 당일에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빠르게 일해서 만든 여유 시간에 또 다른 일이 들어온다.

그것도 빨리 끝내면 또 다른 일이 들어온다.

일을 잘해서 시간이 남았는데…

왜 나는 더 바빠지고 있지?

조금 억울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도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고 무조건 지금 하는 것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서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빠른 것이 항상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에서 오래 일하면서 내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처음에는 느린 업무 속도가 답답했다.

‘왜 바로 답을 안 하지?’

‘이 정도는 오늘 처리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모든 일을 즉시 처리하지 않는 것이 꼭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있고,

내가 급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상대방에게도 반드시 가장 급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빠른 결과와 좋은 결과가 항상 같은 것도 아니다.

디자인은 특히 그렇다.

빨리 만들 수 있는 것과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필요한 작업인데 속도에 취해서 너무 빨리 답을 내놓으면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스스로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예전처럼 모든 이메일에 즉시 반응하지 않는다.

급한 것은 빠르게 한다.

간단한 수정도 가능하면 빨리 처리한다.

하지만 생각이 필요한 작업에는 일부러 시간을 둔다.

이게 뉴질랜드에서 일하면서 내가 배운 의외의 변화 중 하나다.

‘빨리빨리’를 버린 게 아니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여전히 빠르게 일한다.

아마 성격상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속도를 무조건 최대치로 사용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빠르게 해야 할 때 빨리 하고,

생각해야 할 때는 천천히 하고,

상대방이 급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 긴급 상황으로 만들지 않는 것.

이게 생각보다 중요했다.

한국에서 배운 속도는 뉴질랜드에서 분명 내 경쟁력이 됐다.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고, 새로운 환경에서 자리를 잡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했다.

해외에서 일하면서 나는 새로운 기술 하나를 배운 게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속도에 브레이크를 다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지금도 가끔 누군가 간단한 수정 요청을 보내면 1분 만에 끝내놓고 손가락이 바로 Send 버튼으로 간다.

그러다 한번 생각한다.

‘잠깐. 이거 지금 바로 보내야 하나?’

그리고 가끔은 조금 있다가 보낸다.

왜냐하면 너무 잘하면…

정말 다음부터 더 빨리 해달라고 한다.

그건 한국이나 뉴질랜드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