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3D 외주대신, AI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서의 역할 변화
비싼 3D 외주를 끊었다. AI 이후 디자이너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신제품 컨셉 하나를 보기 위해 외부 3D 디자이너에게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했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등장한 뒤 우리 회사의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AI가 디자이너를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직접 만드는 사람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신제품 하나 보여주는데 이렇게 돈이 많이 든다고?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 보면 가끔 3D 이미지가 필요하다.
아직 실제 제품은 없는데,
“이 제품이 실제로 나오면 어떻게 보일까?”
“이런 형태로 만들면 소비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패키지와 같이 놓았을 때 어떤 모습일까?”
이런 걸 미리 보여줘야 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외부 3D 디자이너나 전문 업체를 찾아서 브리프를 전달하고, 견적을 받고, 기다렸다가 첫 번째 시안을 받고, 다시 수정사항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비쌌다.
특히 뉴질랜드는 시장 자체가 크지 않다 보니 내가 원하는 수준의 작업을 해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해외 프리랜서를 찾아보기도 하고, 몇 군데 견적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좋은 3D 비주얼이 필요하면 돈을 써야 한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이 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 3D 외주를 안 쓰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제 3D 외주를 없애자”라고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AI 이미지 툴을 이것저것 사용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그냥 아이디어를 확인하는 정도로 썼다.
제품 스케치를 넣어보기도 하고,
재질을 바꿔보기도 하고,
조명을 바꿔보기도 하고,
“이 제품을 이런 공간에 놓으면 어떨까?”를 테스트해봤다.
그런데 결과가 점점 좋아졌다.
예전 같으면 외부 디자이너에게 브리프를 보내야 확인할 수 있었던 아이디어를 내가 그 자리에서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더 둥글게.”
“플라스틱 재질로.”
“조명은 왼쪽에서.”
“이건 너무 고급스럽다. 조금 더 mass market 제품처럼.”
계속 바꿔볼 수 있다.
마음에 안 들면 버리고 다시 하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최근 제품 컨셉 작업에서 외부 3D 디자이너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일부러 외주를 없앤 게 아니라, AI가 자연스럽게 그 과정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걸 깨달았을 때는 조금 섬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3D 디자이너가 필요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AI로 멋진 제품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실제 제품을 제작하기 위한 정확한 3D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정확한 치수와 구조가 필요한 CAD 작업,
금형 제작,
Engineering,
Manufacturing-ready 모델링 같은 영역까지 이미지 생성 AI가 전부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 회사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그 앞 단계다.
Concept Development와 Visualization.
예전에는 아이디어를 ‘보기 위해서’도 전문가의 손이 필요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있다면 일단 AI로 빠르게 꺼내볼 수 있다.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 이 차이는 꽤 크다.
컨셉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며칠 기다릴 필요가 없고, 초기 단계의 아이디어에 큰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I가 3D 시장을 없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돈을 받고 할 수 있었던 작업의 경계선을 빠르게 이동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더 무섭다.
툴을 잘 다루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대가 끝나가는 것 같다
예전에는 특정 프로그램을 아주 잘 다루는 것 자체가 상당한 경쟁력이었다.
Photoshop을 얼마나 잘하는지,
Illustrator를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지,
3D 프로그램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당연히 지금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기술만으로 만들어졌던 가치 중 일부를 AI가 너무 빠르게 가져가고 있다.
버튼 몇 번이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AI를 실제 업무에 사용해보면 생각보다 말을 안 듣는다.
내가 원하는 건 분명히 이것인데 엉뚱한 걸 만들어주기도 하고,
제품 형태를 마음대로 바꿔버리기도 하고,
로고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한 번 잘 나왔다고 다음에도 똑같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AI를 많이 사용할수록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구나.”
프롬프트보다 중요한 건 ‘설명하는 능력’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Prompt Engineering이라는 말을 많이 신경 썼다.
무슨 특별한 단어를 넣으면 결과가 좋아지고,
어떤 순서로 작성하면 더 잘 나온다는 식의 팁도 찾아봤다.
물론 그런 기술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계속 사용해보니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그냥,
“고급스러운 제품 광고.”
라고 입력하는 것과,
빛이 어디에서 들어오고,
제품 표면이 어떤 재질이고,
카메라가 어느 높이에 있으며,
배경과 제품 사이의 대비가 어느 정도이고,
전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이게 AI만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디자이너가 Photographer에게 브리프를 전달할 때도 필요하고,
3D Artist에게 설명할 때도 필요하고,
팀원에게 Creative Direction을 줄 때도 똑같이 필요하다.
결국 AI 시대에 새롭게 생긴 능력이라기보다,
원래 좋은 Creative Director에게 필요했던 능력이 더 중요해진 것에 가깝다.
내가 아는 만큼밖에 요구할 수 없다
AI를 사용하면서 또 하나 크게 느낀 것이 있다.
AI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내가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모르면 별 소용이 없다.
내가 조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cinematic lighting”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
Photography를 조금 알고 있다면 빛의 방향이나 강도, 렌즈, Depth of Field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재질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단순히 “plastic”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표면과 반사가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다.
Typography를 알고,
건축을 알고,
영화를 알고,
Photography를 알고,
패션을 알고,
브랜드를 알수록 AI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이 부분이 나는 굉장히 재미있다.
AI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이 아는 사람이 AI를 훨씬 잘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작업할 때도 그렇다.
귀찮아서 대충 몇 줄 적으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대충 만든 것 같은 이미지’가 나온다.
반대로 머릿속에서 원하는 장면을 충분히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결과가 확 달라진다.
결국 AI가 내 생각을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을 증폭시켜주는 쪽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요즘 나는 예전보다 직접 만드는 시간은 줄어들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늘었다.
수십 개의 결과 중 어떤 방향이 맞는지 고르고,
왜 이게 브랜드에 맞는지 판단하고,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고,
다시 방향을 수정한다.
이 과정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점점 제작자에서 디렉터로 이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손으로 만드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AI 결과물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결국 디자이너가 다시 손을 대야 완성되는 작업도 많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만들어야만 ‘내 디자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Photographer와 일한다고 Creative Director가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3D Artist와 함께 일한다고 Art Director가 모델링을 직접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AI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방향을 정하고,
결과를 판단하고,
필요한 수정을 지시하고,
최종적으로 브랜드에 맞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AI는 또 하나의 제작 도구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건 ‘만드는 기술’보다 ‘판단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AI가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몇 년 뒤에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 중 또 다른 부분이 자동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 잘하면 앞으로도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대신 내가 요즘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무엇이 좋은 결과인지 판단하는 눈.
왜 이 방향이어야 하는지 설명하는 능력.
브랜드와 소비자를 이해하는 능력.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능력.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능력.
AI는 이미지를 굉장히 빠르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아직 사람의 몫이다.
적어도 지금 내가 현업에서 AI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그것이다.
예전에는 ‘내가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가’를 많이 고민했다면,
요즘은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나 좋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어쩌면 AI 시대에 디자이너가 살아남는 방법은 AI보다 더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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