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이 바닥을 닦는데 아무도 안 일어났다, 뉴질랜드 직장에서 처음 배운 ‘수평적 문화’
뉴질랜드 직장에서 처음 배운 ‘수평적 문화’
뉴질랜드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다들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청소도구를 가져와 사무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바닥에 뭔가 끈적한 게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바닥보다 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안 움직였다.
진짜 아무도.
누구 하나 “제가 할게요”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별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들 자기 모니터를 보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사장님이 지금 바닥을 닦고 있는데?’
‘아무도 안 일어나?’
‘내가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순간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K-직장인의 DNA가 자동으로 작동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사장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Hey! I can do it!”
내가 하겠다고.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였다면 누군가,
“아이고, 제가 할게요.”
하면서 자연스럽게 청소도구를 받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장님은 오히려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주변 동료들도 나를 슬쩍 쳐다봤다.
‘왜 갑자기 저러지?’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사장님은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한국에서는 보스가 바닥 청소하면 직원들이 그냥 안 있나 봐. 다들 좀 보고 배워야겠네.”
사람들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속으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장님이 바닥을 닦는데 어떻게 다들 가만히 있지?’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동료들이 조금 버릇없다고까지 생각했다.
특히 나보다 어린 직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는 정말 위아래가 없구나.’
싶었다.
그때는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도 잘 몰랐다.
몇 달 뒤, 또 비슷한 일이 생겼다

그 일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
사장님의 손님이었다.
잠시 뒤 사장님이 직접 탕비실로 가더니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내 안의 K-직장인 센서가 작동했다.
‘사장님이 직접 커피를?’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할게요.”
그런데 이번에는 사장님이 손사래를 쳤다.
“No, no. It’s okay.”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 손님인데 내가 해야지. 괜찮아. 가서 일해.”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내 손님인데 내가 해야지.’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사장님이 초대한 손님이고,
사장님이 커피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사장님이 커피를 타는 모습을 보자마자 자동으로 일어났을까?
누가 나에게 시킨 것도 아닌데.
혹시 이상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자리에 앉아 일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이 바닥을 닦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이 더러워서 사장님이 닦았다.
누군가에게 시킨 것도 아니고,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다.
그냥 본인이 발견했고 본인이 닦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동으로 생각했다.
‘저건 사장이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면 직원인 누군가가 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다.
사장님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나 혼자 머릿속에서 조직도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
직원.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
누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그때 처음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직급에 따른 행동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수평적인 회사라고 직급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뉴질랜드 회사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장은 사장이다.
Manager는 의사결정을 하고,
직급에 따라 책임도 다르고,
당연히 연봉도 다르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뉴질랜드에는 위아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면서 느낀 차이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직급은 존재하지만, 그 직급이 사람의 신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게 나에게는 굉장히 새로웠다.
사장이라고 해서 누군가가 커피를 대신 타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Manager라고 해서 자기 컵을 다른 사람이 치워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직급이 낮다고 해서 잡다한 일을 자동으로 맡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보다,
지금 이 일이 누구의 일인가가 더 중요했다.
사장님 손님이면 사장님이 커피를 만든다.
내 프로젝트면 내가 책임진다.
다른 사람의 프로젝트에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준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였다.
처음에는 ‘버릇없음’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
이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초반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꽤 많았다.
사장님에게 직원들이 너무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신기했다.
이름을 그냥 부르는 것도 어색했다.
사장님 의견에 누군가 대놓고,
“I don’t think that’s a good idea.”
라고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속으로 놀라기도 했다.
‘저렇게 말해도 되나?’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장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걸 몇 번 경험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 일부는 사실 예의라기보다 서열에 맞춰 행동하는 습관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물론 어느 문화가 더 좋다고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 직장에도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이 있고,
뉴질랜드 직장에도 분명 불편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경험이 내가 회사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꽤 많이 바꿔놓았다.
눈치를 덜 보기 시작하니 오히려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가장 편해진 건 의외로 작은 것들이었다.
사장님이 뭔가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상사가 늦게까지 남아 있다고 해서 나도 괜히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Manager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입을 닫을 필요도 없다.
물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존중과 눈치는 다른 것이었다.
그 차이를 이해하고 나니 회사생활에서 쓸데없이 소비하던 에너지가 꽤 많이 줄었다.
‘이 말을 하면 기분 나빠할까?’
‘내가 먼저 일어나면 안 되는 건가?’
‘사장님이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도 되나?’
이런 생각보다,
‘내가 지금 맡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그게 내가 뉴질랜드 직장문화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장님이 바닥을 닦아도 나는 일어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사장님이 바닥에 뭔가를 흘려서 닦고 있다고?
나는 그냥 내 일을 한다.
커피를 만들고 있다고?
본인이 마실 거라면 본인이 만들겠지.
물론 무거운 것을 들고 있거나 정말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당연히 도와준다.
하지만 ‘사장이니까 내가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거의 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뉴질랜드에 와서 버려야 했던 것 중 하나가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한국식 업무 방식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눈치였다.
직급은 역할을 나누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직급이 사람의 높낮이까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
이걸 머리로 이해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몸으로 익히는 데는 꽤 오래 걸렸다.
아직도 가끔 사장님이 뭔가를 직접 하고 있으면 내 안의 오래된 K-직장인이 슬쩍 고개를 든다.
‘가서 내가 한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이제는 속으로 한마디 한다.
‘아니. 그냥 네 일 해.’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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