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AI 돌려봐"라는 한마디에 갇혀버린 디자이너의 창작,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디자인 작업의 시작은 늘 '대화와 공감'이었습니다.

기획자나 브랜드 매니저가 가지고 온 디자인 브리프(Design Brief)가 다소 모호하더라도,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참고 이미지를 함께 찾아보고, 브랜드가 지향하는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논의하며 흩어져 있던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하나씩 완성된 방향성으로 모아가곤 했죠. 그 정성스러운 소통의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귀했던 대화의 자리가 너무나 쉽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AI 돌려봐" – 소통과 깊이가 사라진 시대

요즘 일터에서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ChatGPT(또는 AI)에 돌려봐. 그러면 방향 나오잖아."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기획의 깊이를 만들어가야 할 순간에, 수많은 이들이 대화 대신 AI 입력창을 엽니다. 브랜드의 맥락이나 맥락 속 맥락, 소비자의 섬세한 감성을 고민하기보다는 프롬프트 몇 줄을 입력해 얻어낸 '그럴싸한 결과물'에 의존하죠.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디자이너가 고민 끝에 스케치하고 구축한 기본 아이디어와 창작물 위에,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들이밀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AI로 돌려보니까 이게 훨씬 화려하고 낫던데? 이렇게 바꿔줘."

'기술적 화려함'과 '진짜 디자인'을 착각하는 시선들

그 순간 밀려오는 화와 답답함, 그리고 씁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디자이너가 쏟아부은 고민과 논리, 브랜드의 맥락은 무시된 채, 단지 AI가 몇 초 만에 뿜어낸 화려한 껍데기(Visual)가 '더 뛰어난 디자인'으로 평가받는 현실. 누구나 프롬프트를 쳐서 화려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다 보니, 마치 디자인이라는 영역 전체가 가벼워지고 딸리는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해 봐야 합니다. 과연 누구나 AI로 이미지 컷을 뽑아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디자인'일까요?

AI가 만들어낸 이미지에는 시각적 자극은 있을지 몰라도, "왜 이 디자인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서사(Story)와 책임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AI에 의존하는 세상, 과연 이게 좋은 걸까?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AI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획도, 이미지도, 심지어 아이디어의 방향성마저 AI에게 물어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본래 AI의 역할은 디자이너의 본질적인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구현해 주는 '도구(Tool)'여야 합니다. 주객이 전두되어 AI가 생각의 주체가 되고, 인간은 그저 AI가 뱉어낸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AI라는 똑같은 정답지에 의존하기 시작할 때, 세상의 디자인은 역설적으로 모두 비슷비슷하고 영혼 없는 껍데기로 도배될 것입니다. 깊이 있는 대화도, 고민의 흔적도 없는 결과물들이 매대를 채우고 화면을 채우는 세상... 과연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발전일까요?

💡 그럼에도 디자이너가 지켜내야 할 것

AI가 아무리 화려한 이미지를 3초 만에 만들어낸다 해도, 진짜 문제(Problem)를 정의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며, 맥락에 맞는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인간 디자이너만이 할 수 있습니다.

"AI가 더 낫다"며 화려함에 현혹되는 시선들 속에서 마음이 꺾이고 답답할 때가 많지만, 우리는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생각의 깊이'와 '진정성 있는 소통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기술에 영혼을 넘겨주기보다, AI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만드는 디자인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묻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들에게 주어진 진짜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