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업을 하고 얻은 건 여유가 아니라 자유였다
해외에서 일한다고 하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거기는 워라밸 좋지 않아?”
특히 뉴질랜드라고 하면 조금 더 그렇다. 오후가 되면 일을 일찍 마치고, 커피 한 잔 들고 여유롭게 이야기하고, 한국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 곳. 나 역시 해외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뉴질랜드 회사에서 일해보니 적어도 내가 경험한 현실은 꽤 달랐다.
바쁘다. 정말 바쁘다. 미치도록 바쁘다. 가끔은 숨이 턱턱 막힐정도로 프로젝트가 많다.
처음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키위들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다.
프로젝트는 계속 돌아가고 회의도 많다.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생긴다. 그리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많아진다.
디자이너로 시작했을 때는 내가 맡은 디자인을 잘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역할이 커질수록 보는 범위도 넓어져야 했다.
내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를 봐야 하고, 일정도 생각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업무도 이해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판단해야 하고 때로는 내가 내린 결정에 책임도 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상상했던 ‘느긋한 해외 직장생활’과는 꽤 거리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정말 여유가 많았다. 이 정도는 껌이야! 금방하지!!! 언제부터인지.. 나를 너무 믿어서 인가? 회사가 더 커져서인가.. 느긋함이라곤 없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데도 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
왜일까?
한동안 나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워라밸 때문일까?
물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내가 해외에서 일하면서 좋다고 느꼈던 것은 여유로움보다 자유로움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것. 수다좀 떤다고 상사눈치 안보고, 애가 아프다고 해서 일찍 퇴근하거나 집에서 일한다고 해서 눈치가 안보이고, 한국여행하러 한달씩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눈치가 안보인다. 아파서 못나온다고 해도 눈치가 안보인다. 남편이 아프다고 해도 안나와도 눈치가 안보인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
직급이 낮다고 아이디어를 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직급이 높다고 해서 항상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생각이라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보다 그 아이디어 자체가 중요하다.
한번은 동료가 라인매니저를 따로 불러서.. "너 그렇게 감정적으로 일하면 안된다" 라는 말을 하는것도 봤다... 부하가 상사에게?
물론 현실의 모든 해외 회사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뉴질랜드 회사라고 모두 수평적이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일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경험한 회사와 조직문화 안에서 느낀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은 적게 일하는 삶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해야 했고, 역할이 커질수록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내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제안해볼 수 있었고, 직급이나 나이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과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군가 나에게
“해외에서 일하면 여유로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생각했던 것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롭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그 자유가 워라밸만큼이나 중요하다.

대화 참여하기